잠은 오지 않고 드디어 가을이 온다는 신호를 하는 듯 춥고 낙서 끄적끄적 그리다가 니 생각이 나서 그냥 두서 없이 쓰고 싶어서.
만일 현재 나의 생활이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 된다면 난 아마 단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미쳐버렸을꺼야. 미쳐버릴 듯이 지쳐버린 내 정신과 육체가 초라하고 비참한 듯 해서 무척이나 우울해.
회사에 출근 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발길을 돌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물결쳐서 늘 그 기분을 이기느라 아침부터 피곤해. 두 사람의 일을 혼자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건 알아.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날 항상 시간에 쫓겨 바쁘고 정신 없는 날,
그런 날 다만 이해해 달라는 것 뿐인데.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날 이해해 쥐 않고 욕만해. 빨리하라고.
부장이 내게 요구하는 일들이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하라고 떠밀면 난 그것만 하고 있어야 하는거야. 다른 일들은 그럼 언제하라는 거지? 그 다른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내 옆에서서 계속 내게 욕을 하는데. 빨리 하라고 독촉인데. 그럼 도무지 무얼 먼저 해야하지? 옆에서는 내게 빨리하라고 난리고 부장은 자꾸만 그런 날 부르고 희주한테 전화는 계속 오고. 그럼 뭐가 먼저지?
넌 아니? 내가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?
너무도 쌓여버린 피곤함은 피로회복제로도 더 이상 피로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쌓여.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늘 내게 내일 아침 부엌에서 해야 할일들을 check해. 또 다시 쌓이는 피로. 스트레스.
정숙아. 다만 이런 힘듬이 젊은 날에 느끼는 방황때문에 느끼는 것일까? 사람이 숨 쉬면서 살아간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어려운데 다만 이것들은 하나의 스쳐지나가는 어려움인가..
머리가 아프다. 난 할 수 있을까?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? 아니 할 수 있을꺼야. 이겨낼 수 있을까? 아니 할 수 있을꺼야.
이겨낼 수 있을꺼야. 그치?
흠. 전에 은정이는 참 자신있었는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. 밉다. 자신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밉다. 얄밉다. 때때로 꼴보기 싫게도 느껴진다.
내일은 교회를 다녀와야 겠다. 한 동안 가질 못했다. 교회 가서 회개 기도를 해야겠다. 아마도 한참 기도해야 할 것 같아. 난 지은 죄가 많잖아. 미안해 너도 힘들텐데 이런 우울한 얘기를 해서.
정말 미안해.
1994. 9. 10
정숙이를 사랑하는 은정이
p.s 환기철 감기 조심
뿌리서점에서 신경숙의 "깊은 슬픔"을 훑어보고 있을 때 나온 편지.
누군가의 추억 한장을 갖게 된 듯해서 기분이 묘하게 좋았고, 누런 갱지의 빛깔과 쾌쾌한 종이냄새가 따뜻했다.
